[김새곤원장칼럼] 조선 청백리 지지당 송흠

김세곤(호남역사연구원장)

뉴스24 | 입력 : 2014/11/10 [08:35]
장성군 삼계면에 있는 관수정(觀水亭)을 찾았다. 관수정은 ‘맑은 물을 보고 나쁜 마음을 씻는다.’는 의미로 조선 중종시절 청백리 송흠(1459∼1547)이 말년에 지은 정자이다.


▲     © 뉴스24

중종 시절에 송흠은 기묘사화의 희생자 조광조의 삼촌인 조원기와 함께 대표적인 청백리였다. 송흠은 삼마태수 三馬太守라 불리었다.


지방관이 새로 부임지로 갈 때는 전임 고을에서 가장 좋은 말 일곱 마리를 받는 것이 관례이었는데 그는 세 마리의 말만 받았다. 본인이 탈 말, 어머니가 탈 말, 아내가 탈 말, 각 한 필이었다. 송흠의 어머니는 101세까지 사시어 송흠은 항상 모친을 모시고 다녔다. 

송흠은 정부 예산도 절약하였다. 여산군수로 있을 때는 호산춘이란 술을 손수 빚어 접대비용을 줄이기도 했고, 호산춘 담그는 법을 한글로 적어서 부녀자들에게 널리 알렸다. 송흠은 일곱 번이나 청백리로 뽑힌 명신 名臣이었다.


이러하였지만 그도 관직생활 초기에는 상급자인 금남 최부(1454∼1504)로 부터 역마를 개인 용도로 썼다 하여 혼 줄이 나기도 하였다. 성종 임금 말년에 최부와 송흠은 홍문관에서 같이 일하고 있었다. 최부는 응교(정4품)였고 송흠은 정자(정9품)이었다. 두 사람은 같은 전라도 출신이라 가깝게 지내는 터였다.


한 번은 둘이 동시에 휴가를 갔는데, 어느 날 하루 장성이 집인 송흠이 나주에 있는 최부를 찾아갔다. 점심 겸상을 물린 뒤 최부가 송흠에게 느닷없이 무슨 말을 타고 왔느냐고 물었다.


송흠은 역마를 타고 왔다고 했다. 그러자 최부는 역마는 서울에서 고향집에 올 때까지만 타는 것인데, 자기에게 찾아오는 개인 용무에 어찌 역마를 타고 왔냐고 질책하였다. 생각하지도 못한 최부의 질책에 송흠은 몹시 당황하였다. 그는 집으로 돌아갈 때는 역마를 끌고 갔다고 한다.

그런데 휴가를 마치고 홍문관에 복귀한 최부는 송흠의 역마 사적 사용에 대하여 홍문관 감사과에 통고하였다. 그리하여 송흠은  파직을 당하였다. 파직된 날 송흠은 최부에게 인사를 하러 오자, 최부는 “자네는 아직 나이가 젊네. 앞으로는 더욱 조심해야 할 것일세”라며 타일렀다.  


송흠은 이런 공직 초기의 실수를 명심하여 평생토록 청백(淸白)의 길, 인의(仁義)의 길을 걸었다. 마치 살얼음이 언 겨울 강을 건너듯 조심하고, 사방에서 쳐들어오는 적을 경계하듯 두려워하면서 공직생활을 하였다. 또한 백성을 내 처자같이 사랑하고 나랏일을 공정하게 하여 백성들의 신뢰를 얻는 목민관이 되었다. 소위 하늘을 우러러 한 점 부끄럼 없이 벼슬살이를 한 것이다.

1544년, 왜구가 경상도의 사량진 포구를 습격하여 수군들이 죽고 백성들이 피해를 입은 사건이 일어났다. 이때 86세의 송흠은 임금에게 상소문을 올린다. 백병전에 능한 왜구를 막으려면 수군을 보강하고, 기존의 수군 배인 맹선 대신에 판옥선을 만들 것을 건의한다. 비록 낙향하였지만 나라를 걱정하는 모습이 청백리답다.

송흠의 호는 지지당(知止堂)이다. 지지는 ‘멈추는 것을 안다’는 의미인데 노자의 <도덕경> 제44장에는 “만족함을 알면 욕되지 않고, 멈출 줄을 알면 위태롭지 않다(知足不辱 知止不殆)”고 하였다. 송흠은 그의 호처럼 온갖 욕망을 자제하면서 살았다. 돈의 유혹, 청탁의 압력을 이겨냈다.

어찌 송흠만 그랬으랴. 조선의 청백리들은 스스로 조심하고 또 삼가며 물욕을 끊었다.   요즘 공직사회가 흔들리고 있다. 부정부패가 좀처럼 줄어들지 않고 있다. 김영란 법은 국회에서 논의도 안 되고 있다. 이럴수록 청백리 송흠이 그립다. 정말 그립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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