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연재]임진왜란 7년 전쟁 그리고 호남사람들

김세곤 (호남역사연구원장)

뉴스24 | 입력 : 2014/10/27 [09:33]
▲     ©뉴스24
I. 임진왜란 7년 전쟁
o 임진왜란 1592-1598 (정유재란 1597-1598) 
o 한 · 중 · 일 국제전쟁 (동아시아 3국 전쟁)
o 임진왜란 7년 전쟁동안의 호남사람들의 대응과 삶
* 제봉로 (고경명) 충장로(김덕령) 금남로(정충신)
 
 
II. 약무호남 시무국가
   (1593.7.16 이순신의 편지)
1. 임진왜란 초기 전투  1592. 4 - 1593.8


<육전 陸戰>

o 이치전투(1592.7.8) : 권율(광주목사), 황진(동복현감)
o 금산전투에서 순절 (1592.7.10) : 고경명 (고인후, 유팽로, 안영 등)
  - 고경명 순절 이후 전라좌의병(임계영· 박광전 ·문위세 ), 전라우의병(최경회· 최경장)이 일어남. 장성 남문의병(김경수 · 정운룡 등)도 10월에 일어남
o 강화도 주둔 : 김천일
o 1차 진주성 싸움(김시민,김성일) : 최경회, 임계영 (외곽지원)
o 1593.1.8 조명연합군 평양성 탈환, 1.27 명나라 장수 이여송 벽제관 전투에서 패배
o 행주대첩(1593.2.12) :전라관찰사 권율, 승장 처영 등(변이중 화차)
o 2차 진주성 싸움(1593.6) : (10만명 vs 6천명)
   -고립무원, 중과부적
    (진주성 창렬사의 중앙 사당 : 7위 김시민, 김천일, 황진, 최경회, 고종후, 장윤, 유복립, 동쪽 사당 : 양산숙 , 강희열, 강희보 등등)
 * 제2차 장성남문의병 : 김극순, 김극후 순절
 * 의기 논개 (유몽인의 <어우야담> : 기생 vs 최경회 소실)
    -진주성 의암 바위

< 해전 海戰>
 
o 1592.5.4 전라좌수사 이순신, 경상도로 출전. 옥포 해전(5.7)
  물령망동 정중여산.  勿令妄動 靜重如山.
  가볍게 움직이지 말라. 침착하게 태산같이 무겁게 행동하라.
 
o 사천(5.29 거북선 첫 출전) 당포 · 당항포, 한산대첩(7.8), 부산해전(9.1 녹도만호 정운 전사)
* 한산대첩 : 조선수군이 해상권을 장악하다.
  전라좌수사 이순신, 전라우수사 이억기
* 1593.7.15 이순신, 한산도로 진영을 옮김
* 1593. 8월 이순신, 전라좌수사겸 삼도수군통제사가 되다.

2. 국지전(소강상태), 외교전 (1594-1596)
o 1593년 말 -1594년 봄 : 극심한 흉년
( 조경남의 <난중잡록> 1594.5.27)
 
사람들이 서로 잡아먹는 것이 이에 이르러 더욱 심하여 골육(骨肉 부자형제(父子兄弟))이 분리되어 길가는 사람 보듯 하였다.


내가 마침 성중(城中)에 이르렀을 때에 명나라 병사 한 사람이 취하고 배가 불러 지나가다가 길 가운데서 구토를 하자, 굶주린 백성 천백 명이 일시에 달려가서 머리를 모아 주워 먹는데 약한 자는 달려들지 못하고 물러서서 눈물만 흘리는 것을 목격하였다. 독부(督府) 유정(劉綎)이 굶어 죽은 송장이 길에 쌓인 것을 보고 참혹히 여겨 진소(賑所)를 동문 밖에 설치하니, 굶주린 백성이 구름처럼 모여들어 천백 명의 무리가 거기에 힘입어 조금 연명하다가 그 뒤에 모두 그 옆에서 죽었다.


o 팔도의병장 김덕령(1567-1596)
   - 이몽학의 난에 연루되어 옥사(1596.8월) :  춘산곡


o 명나라(심유경)와 일본(고니시) 간의 외교협상 결렬 (1596.9월)  
  - 히데요시,  거짓 보고를 받고 분노하다. 

III. 정유재란 - 전라도, 초토화되다.
도요토미 히데요시는 재침략을 준비하면서 1592년부터 1596년까지 5년간의 전쟁을 면밀히 분석하였다. 그 결과 조선 침략이 계획대로 이루어지지 못한 것은 첫째 이순신 장군이 이끄는 조선 수군이 제해권을 장악한 것과 둘째 전라도를 점령하지 못하여 양곡을 제대로 마련하지 못한 것이 주된 요인이라고 분석하였다.


히데요시는 치밀하게 재침략 지시를 내린다. 이 지시에는 가장 먼저 이순신을 제거한 후에 조선 수군을 궤멸시킬 것, 전라도부터 공격 하고 충청도와 경기도는 정세에 따라 진격할 것, 군인과 양민 및 남녀노소를 막론하고 누구든지 참살할 것, 명나라 군대가 나오면 즉시 보고할 것 등이 포함되어 있었다.
 
“매년 군대를 출동시켜 조선 사람들을  전부 죽여 조선을 빈 땅으로 만든 다음 서도(일본의 서쪽)의 사람들을 옮겨 조선에 살게 하고, 동도의 사람들을 옮겨 서도에 살게 하면 10년 후에는 반드시 성공이 있을 것” 이다. (히데요시의 포고문)


히데요시는 1597년(정유년) 1월13일에 12만 명의 왜군을 동원하여 한반도를 다시 침략했다. 이것이 일명 ‘정유년에 왜구가 다시 난을 일으켰다’는 뜻인 '정유재란(丁酉再亂)'이다.


히데요시는 “전쟁이 이렇게 오래 간 것은 전라도민의 조직적인 반항이 심했기 때문이다. 일본군은 전라도로 진격하여 한 명도 남김없이 모조리 죽여라.”는 정신병자와 같은 명령을 하였다. 이것이 ‘코베기'라는 천인공노할 참극을 알리는 신호탄이었다.


o 이순신이 백의종군하다.
  (1597년 2월26일 한산도에서 서울로 압송함.  3.12 한차례 문초를 당함. 선조가 이순신을 죽이려 함(3.13) 정탁이 상소문을 올려 목숨을 구함. 4월1일에 옥에서 풀려남. 백의종군 길을 감 (경상도 초계 도원수 권율 진영까지) 4.13 모친 변씨 별세. 6.5-7.18 경남 합천군 율곡면 권율 진영 근처에서 자문관 역할)



o 칠천량 해전 (1597.7.16)



o 1597.8.3 이순신, 다시 전라좌수사겸 삼도수군통제사가 되다.



o 남원성 함락 (8.16 초토화 : 만인의총)
 - 코베기, 성폭행(겁탈), 포로들, 초토화



8월16일에 왜군은 남원성을 함락시켰다. 이때 왜군은 정말 잔인하였다. 산하를 불태우고 사람을 닥치는 대로 죽이고 코를 베었다. 코는 전리품의 상징이었다. 이는 도요토미 히데요시의 지시에 의한 것이었다.
 
남원성 전투에 종군했던 일본 승려 케이넨은 8월16일자 '조선일기'에 “성안 사람 남녀 할 것 없이 모두 죽여서 생포한 자는 없었다. 눈뜨고 볼 수 없는 처참한 상황이다. 알 수 없는 이 세상살이, 모두 죽어서 사라지는구나.”라고 기록하고 있다.


o 명량해전 (9.16) 13척 :133척 , 실로 천행이었다. 
   명량해전 이후에 이순신 - 고군산 열도로 이동 - 신안 장산도 - 목포 고하도 - 완도 고금도에 삼도수군 통제영 설치(1598.2월)
 
 일본군 - 전라도 지역을 초토화. 해남 영광 함평 지역을 초토화
* 9.23 강항 일가 포로가 됨.  강항(간양록) : 일본주자학의 아버지
  (후지와라 세이카와의 만남)
* 9.26 정희득 일가 포로가 됨 (월봉해상록)
* 장성 기씨부인 순절(일비장),  양씨삼강문(양산숙 일가)
* 소쇄원 양천경 일가(부인과 두아들 그리고 딸) 4명 (1597년에 끌려가서 1617년에 조선통신사와 함께 쇄환됨)
<연려실기술>에도  부녀자들의 수난이 잘 드러나 있다.


○ 그때 사대부집 부녀들이 많이 약탈을 당하였는데 왜적이 물러간 뒤에 화를 면한 집에서는 변고를 당한 집과 혼인하지 않으려고 하므로 임금이 근심하여, “이런 풍습이 만약 이대로 간다면 온 나라의 대가(大家) 중에는 거의 완전한 사람이 없겠다.” 하고, 종실과 귀척(貴戚)에게 힘써 권하여 변고를 만난 집과 혼인하도록 하였더니 그 뒤부터는 감히 험점을 구별하는 자가 없었다. 《공사견문》


o 정유재란 중에도 호남의병이 일어났다.
  구례 석주관 전투, 박광전 의병, 조경남 의병, 윤진이 입암산성에서 순절, 장성 변윤중의 순절 등
 * 시마즈 요시히로 군대 행로 (해남까지 내려왔다가 사천으로 이동)


o 명나라 수군 제독 진린 합류(1598.7)



o 고흥 절이도 해전 (송여종)



o 순천왜성 싸움 (1598.9-10)



o 노량해전 (1598.11.18-19) 이순신 전사 (11.19)


IV. 전쟁이 끝난 후 -  정유재란의 참상  


1. 코무덤
   일본 교토의 코 무덤에는 최소한 5만개 이상의 코가 묻혀있다. 이 중 장성 ․ 진원 ․ 영광 ․ 금구 ․ 김제 등 전라도에서 취한 코가 2만개 이상  된다. 일본 문헌에 의하면 9월21일에 진원현(지금의 장성군 진원면 일대)에서 870개의 코가 일본에 도착했고 영광과 진원에서 10,040개가 도착했다고 기록되어 있다.


1597년 9월에 나베시마 가츠시게는 금구와 김제에서 취한 코 3,369개를 도요토미에게 보냈는데 그 증명서가 지금도 남아 있다. 코무덤은 교토에만 있는 것이 아니었다. 후쿠오카현 카시이, 오카야마현의 비제시 備前市와 쯔야마시 津山市, 가고시마 성 부근에도 코 무덤이 있다.

2. 포로들
 왜군들은 수많은 조선인을 일본으로 끌고 가 노예처럼 부렸다. 
 
도요토미 히데요시가 1597년 11월29일에 나베시마 나오시게에게 보낸 공문을 보면, ‘잡아둔 조선인 포로 중에서 세공, 바느질 잘 하는 사람, 솜씨가 있는 여자를 진상하라’고 적혀 있다. 이 공문의 해설에는 ‘히데요시의 정실부인인 오네가 조선인 여자를 하녀로 부리면서 30년간 데리고 있었다.’고 기록되어 있다.


또한 일본인들은 나가사키에서 포르투갈 상인들에게 팔아먹기도 하였다. 루벤스의 그림 <조선 남자>의 모델 안토니오 코레아도 포로였는데, 어느 학자는 코레아가 남원출신이라고 주장하고 있다.  


왜군은 심지어 어린아이들까지 끌고 갔다. 남원성에서 순절한 이복남 장군의 셋째 아들과 장성 기씨 부인의 두 아들들이 그들이다. 
 
일본에 잡혀간 조선 포로는 최소한 10만 명으로 추산하고 있다. 1597년 9월에 잡혀갔다가 1599년 7월에 조선으로 돌아온 정희득은 일본에 잡혀간 포로가 남자가 3~4만 명은 되겠고, 늙고 약한 여자는 그 수가 갑절이나 될 것이라고 상소문에서 밝히고 있다.


그런데 전쟁 후에 조선으로 돌아온 포로는 6천3 백 명 정도였다. 구우일모 九牛一毛였다.


3. 물적 피해


물적 피해도 엄청 컸다. 방화와 약탈이 전라도 전역에서 일어났다. 
왜군은 마을을 불 지르고 사찰과 정자 등을 불태웠다. 장성의 필암서원과 기영정, 광주향교와 담양 소쇄원, 순천의 송광사 ․ 선암사 등이 불탔다. 각 관아에 비치된 각종 토지대장, 노비대장, 호적대장 등 공문서와 개인 소장 서적도 불탔다.


아울러 임진왜란은 약탈 전쟁이었다. 도요토미 히데요시는 전쟁 초기부터 전투부대와는 별도로 6개 특수부대(도서부 ․ 공예부 ․  포로부 ․  금속부 ․  보물부 ․  가축부)를 편성하였다. 왜군은  많은 학승들을 자문역으로 조선에 종군토록 하여 조선의 문물을 조직적으로 약탈하였다. 상국사의 승열, 안국사의 혜경 등이 그들이다.


6개 특수부서중 도서부는 전적류 典籍類의 수집을 맡았고, 공예부는 도자기 등을 포함한 각종 공예품 및 목공, 직공 織工, 도공 등 공장 工匠의 납치를, 포로부는 한의사와 젊은 남녀의 납치를, 금속부는 조선의 병기및 금속예술품, 금속활자 등의 탈취를 맡았다. 또 보물부는 금은보화와 진귀품의 노획을 맡았고, 축부 畜部는 가축을 포획했다.  

왜군은 닥치는 대로 가져갔다. 불상, 불화, 서적, 활자들은 물론이고 동식물도 조직적으로 가져갔다.


일본 후쿠야마 안국사에는 종군 승려 안고구지 헤게이가 담양 용구산 반야암에서 가져간 불화가 소장되어 있다. 고봉 기대승(1527-1572)이 1557년에 발간한 주자문록도 가져갔는데 이 문집은 지금 일본 내각문고에 소장되어 있다. 노송당 송희경의 <일본행록>도 일본으로 가져갔는데 일본에 끌려간 정경득이 필사하여 가지고 1599년에 돌아왔다.


4. 에도 막부의 경제 · 사회· 문화발전
 
임진왜란 7년 전쟁은 일본에게는 경제 · 사회 · 문화적 발전의 계기가 되었다. 활자나 그림, 서적을 약탈하고 강항등과 같은 유명한 선비들과 우수한 인쇄공들을 포로로 데려가 성리학과 인쇄술을 비약적으로 발전시키는데 이용했다.



아울러 왜군은 수많은 도공을 납치해 갔다. 그래서 임진왜란을 도자기 전쟁이라고 부르기도 한다. 당시에 일본에서는 다도가 유행하여 조선에서는 일상생활에 흔히 볼 수 있는 그릇들이 일본에서는 귀중한 보물로 여겨졌다. 


번주들은 납치한 도공들을  특별히 대우하면서 도자기 산업을 발전시켜 나갔는데 그 중 일본 사가현 아리타로 끌려간 이삼평, 가고시마 나에시로가와로 끌려간 심당길 등은 일본 도자기 산업을 일으킨 장본인이 되었다. 특히 아리타 도자기의 원조 이삼평은 도자기 신이 되어 아리타에는 <도조신사>가 세워져 있다. 


5. 정유재란의 후유증


인구가 크게 줄고 농토가 황폐하여졌다.
조선의 인구는 1591년의 1,300만 명이 1598년에는 1,085만 명으로 215만 명이 감소하였고, 토지 결수도 임진왜란 이전에 1,515,591결 이었던 것이 1604년에는 342,634결로 80%가 줄었다.
 
한마디로 향촌사회가 무너지고 촌락은 황폐화 되었다.  1600년에 진원현은 자립이 불가능하게 되자 간판을 내리고 장성현과 합병하였다. 전국에서 유일한 일이었다.

V. 마치면서 


o 기록의 힘:  조경남 <난중잡록>, 안방준<은봉전서>, 이순신<난중일기>, <호남절의록>, <연려실기술>등


o 지금도  임진왜란은  계속되고 있다. 
  일본의 역사인식, 역사왜곡 : 위안부, 독도, 일본 오사카 성 천수각의    임진왜란  영어 번역 글  Korean Campaign  
 
  *  임진왜란이 코리언 캠페인이라니?

o 폴란드 아우슈비츠 수용소 기념관 입구에서 읽은 글귀 
 역사를 기억하지 못하는 자는 다시 한 번  그 역사에 얽매이게 된다.
 The one who does not remember history is bound to live through it again.


o  역사는 반복된다. 
- 유성룡의 저서 <징비록>이 말해 주듯이 조선은 임진왜란이 일어난 것을 철저히 반성하지 못하여 정유재란이 끝난 후 312년만인 1910년에  일본에 강제 병합 당하였다.
- 한편 1909년 7월6일에 일본각의는 ‘한일병탄에 관한 건’을 통과시켰다. 여기에는 적당한 시기에 한국의 병합을 단행하기로 하고 병탄을 위한 준비 작업을 착착 진행하였다. 그 중 하나가 남한대토벌작전이다.
 
사실상 호남의병 대학살이었던 이 작전은 1909년 9월1일부터 10월25일까지 이루어졌는데,  일본군 2개 연대 2,300명과 군함 10척이 동원되었고  전사한 호남의병이 420명, 체포나 자수한자가 2천여 명이었다. 


 * 전라도 사람들은 임진왜란 때의 옛날을 몽상하여 일본인을 경시하는 풍조가 있기 때문에 이 기회에 대토벌을 단행하여 뿌리를 뽑아, 일본의 무위를 보여주어 일본의 역사상의 명예회복을 행하지 않을 수 없다. (일본 임시한국파견대사령부 - 남한 폭도 대토벌 실시보고)

<참고문헌>
o 김세곤, 임진왜란과 호남사람들, 온새미로, 2011
o 김세곤, 임진왜란과 호남사람들 2, 온새미로, 2013
o 김세곤, 정유재란과 호남사람들, 온새미로, 2014
o 이덕일, 근대를 말하다, 역사의 아침, 201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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